루시퍼 이펙트: 무엇이 사람을 악하게 만드는가 4
The Lucifer Effect : Understanding How Good People Turn Evil

필립 짐바르도 Philip George Zimbardo 저 / 이충호, 임지원 공역 / 웅진지식하우스

 

시스템의 생명력이 모두를 속박한다.
사흘 째 되는날은 가족들의 면회가 예정되어 있다. 짐바르도는 이 달갑지 않은 방문자들이 학대의 증거를 포착할 수 없도록 연극을 하기로 결정했다. 머리에 뒤집어 쓰게 만든 스타킹을 없애고, 누구든 교도소 생활에 불평하는 사람이 있으면 면회가 중단 될 것이라는 협박을 했다.

그리고 주야간 근무조 교도원들을 모두 소집하여 혹시 모를 습격에 대비하는 등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다. 연구진들은 면회객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그들의 통제하에 두고자 했다. 그리하여 면회 수칙을 만들었으며, 여기에 아주 교묘하고 야비한 수단을 첨가했다.

가령, 면회자 수를 한 사람 당 두 명으로 제한하거나, 재소자들의 식사 시간이 늦어짐으로써 --갑작스럽게-- 면회시간을 10분으로 줄인다거나 하는 식으로 간악한 방법을 쓴다. 이렇게 체계적이고 의도적으로, 사악하게 조성된 환경은 막강한 위력을 갖는다. 즉, 실험 참가자나 방문객들 모두가 이견없이 규칙을 따르도록 만드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면회는 형식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런 형식에 사람들은 속박된다.

다시 실험으로 돌아가보자. 첫 면회객이 들어선다. 수감자의 부모다. 악의적으로 꾸며진 환경 때문에 면회객들은 입감자와 악수를 하는 것 까지도 교도관에게 허락을 구한다. 이 세상에서 가장 친근한 만남, 부모와 자식의 관계마저도 틀어지게 만드는 이 어처구니 없는 상황.

바로 교도소장이 원했던 그 결과다. 그런데 잠깐!!! 이 부분에서 뭔가 어색한 위화감을 느낀 사람이 있을까?
오래 간만에 만난 부모와 자식이 악수를 한다? 어머니와 아들이 악수를 한다고? 포옹이 아니고? 무시무시한 상황이다. 수감자 뿐만 아니라 면회객의 심신에도 이상 징후가 나타난 것이다.

 

한편, 면회 시간 내내 일부 교도대원은 곤봉을 슬슬 휘두르며 공포 분위기를 조장한다. 부모와 형제자매의 속깊은 대화를 방해하는 것은 예삿일이다. 규칙 위반이라고 단호하게 지적하면 대화는 끊어지기 마련이다. 여기서 필자를 섬뜩하게 만드는 것이 있다. 눈빛이다. 입감자의 부모가 면회실로 들어오자, 한 교도관은 그들을 노려본다.

아무런 관련이 없는 타인에게 향해지는 증오 가득찬 안광! 아마도 그는 면회객들이 자신의 숭고한 행위, 그러니까 죄인들을 교정하는 권리이자 의무를 훼방놓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당신은 이 부분에서 형무소 측의 잘못을 지적하며, 이러한 환경을 만들어 낸 형무소장에게 화가 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감정은 나쁜 시스템을 창조해 낸 교도소장 개인에게 책임을 묻고 있는 셈이다. 태어날 때부터 악의 씨앗을 갖고 있던 자가 기회를 만나서 만개하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다. 그러나 형무소장은 그저 평범한 교수이고 실험을 위해서 그렇게 한 것이다.

그리고 이 상황에 매몰되어 자신도 모르게 악을 행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너와 나의 구별이 없다. 객관과 주관은 성립하지 않는다. 실험 참가자나 이를 관찰하고 있는 독자 여러분, 그리고 필자 까지도 이 상황에 빠져들어간다.

 


 

이처럼 통제된 환경과 감시자의 존재로 인해 입감자는 거짓을 말할 수 밖에 없다. 한 재소자의 형이 지금 그만 두고 나갈 수 있다면 어떻게 하겠냐고 묻자. 이렇게 대답한다.

"지금 그만둘 수는 없어. 여긴 아주 좋은 곳인데 뭐."

그리고 면회객들은 강요하지도 않았는데 서둘러서 자리를 뜬다. 한 피험자의 어머니는 면회를 끝내며 이렇게 당부한다.

"자, 착하게 행동하고 규칙을 잘 지켜라."

아버지는 부드럽게 어머니를 문 쪽으로 이끈다. 그들이 시간을 넘기면 다른 사람들이 면회의 특권을 누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어떤 면회객은 입감자의 비참한 모습을 보고 교도소측에 불평을 한다. 그러면 실험의 총책임자이자 감독관 역할을 맡은 짐바르도가 나서서 이렇게 말한다.

"그것은 입감자 개인의 문제이며 교도소 운영방식에는 어떠한 헛점도 있지 않다."

하고 넌지시 암시를 주는 것이다.

 

여기서 충격적인 사실을 한 가지 더 언급해야 하겠다. 면회 때 교도대원과 수감자의 숫자는 2명 대 9명이었다. 이와 같은 우세한 상황에서도 재소자들은 교도원을 제압하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보통의 중산층, 그러니까 준법 정신을 가지고 권위를 따르며 시스템에서 벗어나 본 적이 별로 없었던 사람들이다.

따라서 공격적인 행동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만약, 법을 지키지 않아서 감옥에 갖힌 경험이 있었던 사람들이라면 --이들은 대개 소득 하위계층임-- 충분히 상황을 장악했을 것이다. 뒷 부분에서 언급할 것이지만, 가석방 심사를 맡은 한 심사위원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너희 백인들은(보통의 중산층) 사람 말을 잘 듣지. 그러니까 그들은 자기네가 옳은 일을 한다고 생각할거야. 다른 사람들도 다 하는 일이라면 말이지."

참고로 이 심사위원은 실제로 형무소에서 복역한 적이 있으며, 짐바르도는 이 인물의 도움을 받아서 교도소 환경을 정교하게 꾸밀 수 있었다. 이처럼 우리 모두는 환경에 지배당한다. 수감자들은 자원해서 이 연구에 참여했다. 면회인들은 의도하지는 않았음에도 실험에 참가한 셈이 되었다. 그리고 이들 모두가 교도소측이 만들어 낸 씨스템에 함몰되었다.

 

 

수치심이 파괴적인 행동을 낳는다.
면회가 끝났다. 실험자들은 안도의 한 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아직 안심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짐바르도의 지휘 아래 모든 연구진들과 교도관들은 습격에 대비 해야만 했다. 언제 어느때 폭도들이 들이닥쳐 이 실험을 끝장내 버릴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교도소측은 함정을 파고 폭동을 진압할 준비를 갖췄다.

그런데 아이러니 하게도 폭도를 대신하여 방문자가 찾아왔다. 바로 짐바르도의 절친이자 동료 교수였다. 그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물었고 곧바로 이 환경에 압도당했다. 피험자들의 처지를 동정하기는 커녕, 가해자의 입장에서 인신공격 발언을 하며 여러가지 질문을 쏟아낸다. 이에 대해 짐바르도는 일단 화가 치밀었다고 고백한다.

일촉즉발의 교도소 폭동을 마주하고 있는 위급한 상황에서, 진보적이고 감상적이고 학구적이고 나약해 빠진 학자 나부랭이를 상대하고 있어야 한다니. 짜증이 확 밀려왔지만 당면한 문제에 집중하기 위해서 건성으로 대답하고 그 친구를 따돌린다. 시간이 흘러 마침내, 그들 모두가 실책을 깨달았다. 이 때 가장 먼저 찾아오는 감정은 수치심이다.

창피함에 서로가 눈을 마주치지 못한다. 누구나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는 것은 힘든일이다. 그리하여 연구진과 교도대원들은 이 사실을 비밀로 하기로 암묵적 동의를 한다. 이제 SPE 실험은 현실보다 더욱 잔인하게 전개가 된다. 그들의 수치심은 파괴적이고 적대적인 성향을 끄집어낸다.

바꿔 말해, 자책감과 좌절감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애꿎은 재소자들에게 보복이 가해진다. 이들의 실수는 무엇일까? 바로 데블스 애드버킷(devil's advocate)의 부재다. 즉, 어리석은 결정을 피하기 위해서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하는 사람' 이 있었어야 했다는 점이다. 하지만 모두가 이 상황에 함몰되어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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