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최초의 차에 대한 기록 : 올바른 역사인식
대렴설 이전에 이미 차는 불교가 융성한 신라시대에 상당수의 사찰에서 음용되어 왔고, 차를 수행의 한 방편으로 이용했다는 기록들이 많이 등장한다. 차가 한반도에 처음으로 등장한 것은 삼국사기보다 70여년이나 앞선 가야국기(伽倻國記) 때 처음 등장한다.

2세기경에 쓰여진 가야국기에는 인도의 아유타국 공주인 허황옥(許黃玉 : 33 - 89)이 금관가야의 왕비로 시집 오면서 차씨와 차를 가져왔다고 전하고 있다. 또한, 백제때에는 침류왕 384년에 마라난타라는 인도승려가 불교를 전하면서 차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가야라는 어원 또한, 인도에 있는 Gayaa라는 도시의 이름을 따서 붙인 것이니, 한 국가의 이름을 가야라고 지을만큼 그 교류가 활발했을을 알 수 있다. 신라는 해상왕 장보고의 바다길을 통해 페르시아, 즉 지금의 이란인들과 교역을 할 정도였으니, 그보다 가까운 인도와의 교역은 더 말할 나위가 없었을 것이다.

또한, 이능화(李能和)의 조선불교통사(朝鮮佛敎通史)에 "김해의 백월산에는 죽로차가 있었는데, 세상에서는 가야의 수로왕비 허씨(허황옥 : 인도 아유타국(阿踰陀國)의 공주)가 인도에서 가져온 차씨(48년)를 심어서 된 것" 이라고 전하고 있다.

"삼국유사"의 "가락국기"조 신라 30대 법민왕 관련 기록은, 가락국 시조 수로왕의 제사에 차(茶)를 제수품목에 넣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 해가 서기 661년이었는데, 이 연대는 육우(733~ 804)가 태어나기 72년이나 앞선 것이다.

신라 승려 충담(忠談)이 경주남산 삼화령의 미륵에게 차를 공양하고 돌아오던 길에 경덕왕(재위 742~ 764)을 만나 왕에게 차를 달여준 것이 서기 765년의 "삼국유사"의 기록이며, 이는 육우의 다경보다 무려 100여년이나 앞선 기록이다.

또한, 중국에서 지장보살의 현신이라 추앙받는 신라의 지장(地藏 : 김교각 : 金喬覺 : 696 - 794)스님은 중국 구화산에 들어가 그곳에 정착하여 많은 제자를 양성했다. 이때 신라의 차를 가져가 구화산에 심어 구화산차의 시조가 되었다.

지장스님이 신라의 차씨를 가지고 중국으로 간 것이 서기 718년이었으니, 중국의 육우가 "다경(茶經)"(茶經)"을 짓기 훨씬 전의 일이다. 지장스님이 신라에서 자라는 차의 종자를 가지고 중국 구화산으로 가서 차씨를 심어 퍼뜨린 것이 728년인데, 이 연대는 육우가 "다경(茶經)"의 초고를 완성한 760년보다 32년이나 앞선 시기 였다.

이후, 자장율사, 원효대사, 지장스님등의 행적에서도 차는 선 수행자의 보조수단으로서 자주 등장한다. 자장율사(慈藏律師 : 590 - 658)의 행적에서는 당나라 청량산에서 문수보살께 기도하고 가사와 사리를 받고 643년에 돌아오면서 차묘목을 가져왔다고 기록이 되어 있다.

고려때 이규보의 남행월일기(南行月日記)에보면 원효가(元曉 : 617 - 686) 원효방에서 차생활을 했다고 씌어져 있다. 유독 원효만이 차를 마셨다고는 할 수 없으므로, 이는 당시 사찰 승려들 사이에 차가 일반화 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말 그대로 다반사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와같이 앞선 역사의 기록이 있는데도, 이보다 63년이나 뒤에 신라 사신 대렴이 중국에서 차씨를 가져와 지리산에 심은 사실을, 우리나라 차의 기원으로 삼기에는 너무나 협애한 역사관이 아닐 수 없다.

정리하면 한국에 처음 차가 들어온 것은 2세기때 가야국때이고, 이후 4세기 백제때 마라난타가 백제에 차를 심어 상당히 성행한뒤에 신라에도 전파가 되었다. 차가 언제 등장했는지가 중요한것은 아니지만, 행여나 축소, 왜곡된 역사 일지도 모르기에 이를 바로 알리고자 할 뿐이다.

기원과 역사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