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 원인이 된 미국 독립운동
대체로 산업혁명 이전까지 영국의 일반 서민들은 쉽게 차를 얻을 수가 없었다. 설사 차를 구했다 하더라도 필경 그것은 질이 낮은 종류였다. 당시 영국의 차 값은 같은 무게의 은과 동일한 가치를 가질만큼 대단한 고가의 상품이었다.

차의 종주국인 중국에서도 차가 일반에게 확산되기전에는 엄청나게 비싼 만병통치약의 귀한 상품이었다. 삼국지의 유비가 차를 얻어 어머니를 봉양하려다, 황건적에게 사로잡혀 봉변을 당한다는 이야기를 누구나 한번쯤은 들어보았을 것이다.

따라서, 차를 전적으로 수입에 의존하는 영국으로서는 더 말할 나위가 없었을 것이다. 이처럼, 차를 희구했던 영국은 마침내 인도의 아삼 지방에서 야생차를 발견하게 되어, 본격적으로 양질의 홍차를 대량생산 하게 된다.

이를 계기로하여, 전격적인 식민정책과 더불어 방글라데시, 스리랑카(실론)등으로 점자 홍차 재배지를 확장하게 된다. 한편 네덜란드 또한 인도네시아에 본격적인 차밭을 개발하게 되는데, 이로써 현재의 인도, 스리랑카, 케냐와함께 세계 4대 홍차 생산국의 기틀을 마련하게 된다.

미국 독립혁명의 발단이 되었던 보스턴 차 사건이 있다. 역사 교과서에는 1773년 미국 식민지의 주민들이 영국 본국으로부터의 차 수입을 저지하기 위하여 일으켰던 사건이라고 간단하게 서술되어 있는데....

이 사건의 중심에는 당시의 국제정세가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이 당시 유럽에서는 영국과 프랑스의 7년전쟁이 결국 영국의 승리로 끝나게 된다. 이 결과로 영국은 캐나다를 식민지로 삼게 되지만, 상처뿐인 영광으로 전쟁에 소요된 비용이 너무 많아 국고가 텅텅 비게 된다.

이처럼 부족한 재정을 메꾸기 위해 영국은 차에 대해 과세를 결정하게 된다. 당시 동인도회사에 의해 독점거래되던 차에 세금이 더해지니 가격은 당연히 상승하게 되고, 자연스럽게 미국에는 밀수가 횡행하게 된다. 결국 영국의 대미 차 수출은 타격을 입게되면서 네덜란드로부터 차 밀수가 성행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온다.

이에 울며 겨자먹기로 영국의회는 과세없이 차를 미국에 수출해도 된다는 차조례를 가결하고, 드디어 차를 한가득 실은 배가 미국 보스턴에 입항하게 된다. 하지만, 이때까지 밀수로 재미를 보고있던 미국의 상인들이 이에 반발하게 되고, 이에 항의하는 집회가 마침내는 소동을 일으켜 배에 실린 차를 몽땅 바다에 던져버리게 된다.

이를 계기로 보스턴 뿐만이 아니라 각처에서 소요사태가 일어나자 마침내 영국은 보스턴항을 봉쇄하게 되는데, 이 조치는 미국인들의 반감을 사게되고, 1775년 보스턴 교외의 렉싱턴에서 영국 군대와 무력충돌이 발발하게 되는데 이사건이 종국에는 미국의 독립전쟁으로 발전하게 된다.

미독립과 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