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죽고 나 죽자'... 도토리 놓고 벌이는 복수전
도토리를 떨구는 이 곤충, 주삿바늘 부리를 가졌습니다 - 단칼에 끝내는 인문학 곤충기
 

참나무과(상수리나무, 졸참나무, 떡갈나무 등)에 속하는 여러 나무의 열매를 도토리라고 한다. 암사동 선사유적지의 유물을 살펴보면 우리 조상들은 석기시대부터 도토리를 먹어왔음을 알 수 있다. 조선 후기에 편찬된 [산림경제]와 [목민심서]에는 구황작물의 하나로 도토리가 기록되어 있으며 흉년이 든 해에는 목숨을 연명하는 비상식량이었다.

오늘날에는 풍부한 알칼리 성분에 포만감을 더해 주므로 다이어트 식품으로 인기가 있다. 기름진 음식을 먹은 뒤에는 매콤한 냉면에 도토리묵을 넣어 무치면 뒷맛이 깔끔해진다.

상수리나무 명칭에는 역사의 아픔이 함께 한다. 선조가 의주로 피난을 갔을때 먹거리가 마땅치 않자 도토리묵을 쑤어서 바쳤다고 한다. 허기진 배에 도토리묵은 너무나 맛있었으니 이후에도 수라상에 자주 오르게 하여 '상수라'라고 하였으며 그때부터 상수리나무가 되었다.

 

도토리거위벌레 피해 참나무

▲ 도토리거위벌레가 알을 낳고 가지째 잘라낸 도토리. 일부 도토리를 솎아내어 더 실하고 큰 열매가 영글게 한다. ⓒ Daankal Eastolany
 

가장 맛있는 도토리묵은 '졸병 처럼 작다'는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인 졸참나무 도토리로 만든다. 단단한 겉 껍질은 벗겨내고 속 알맹이를 빻아 물 속에 5일 정도 담가 놓는데, 떫은 맛을 없애기 위해 여러번 물을 갈아줘야 한다. 말린 가루를 물과 섞어 한동안 끓이면 걸죽하게 엉기면서 도토리묵이 된다.

 

도토리에 알을 낳고 가지째 잘라낸다
장마가 지난 한 여름 숲을 걷다보면 덜 여문 풋도토리가 가지 째 잘려져 있는 광경을 흔하게 접할 수 있다. 보통 사람들은 거센 비바람에 떨어진 낙과이려니 생각하겠지만 사실은 도토리거위벌레의 작품이다. 인간보다 먼저 도토리의 맛을 알아버린 도토리거위벌레의 산란법을 알아보자.

어미가 알을 낳는 과정은 서 너 시간이 걸리는 고된 노동이다. 먼저 도토리가 열린 나뭇가지를 반 정도 잘라서 기초 공사를 해 놓고 송곳 같은 주둥이로 도토리 속을 파낸다. 자기 몸통 만큼이나 길쭉한 부리 끝에는 날카로운 이빨이 나 있기에 드릴과 톱의 역할을 겸한다. 구멍을 다 뚫으면 입구에 알을 한 개만 낳고 주둥이로 도토리 중심부 까지 밀어 넣는다.

산란이 끝나면 파낸 톱밥으로 구멍을 메우고 나뭇가지를 완전히 잘라서 땅에 떨어뜨린다. 수컷은 암놈이 알을 다 낳을 때까지 곁에서 주변을 경계한다. 암컷을 보호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다른 수놈과의 교미를 막으려는 이기적인 목적이다. 약 5일 정도 지나면 애벌레가 부화하여 도토리 속을 파먹고 한 달 정도 몸을 불린다.

 

도토리거위벌레

▲ 도토리거위벌레. 송곳 같은 주둥이로 도토리에 구멍을 내고 산란한다. ⓒ Daankal Eastolany
 

종령 애벌레는 한 여름에서 가을 사이에 도토리 속을 나와 땅 속으로 들어가 번데기가 되었다가 이듬해 오뉴월에 성충으로 탈바꿈한다. 무더위를 겪지 않아도 될 뿐만 아니라 천적으로 부터 자신을 숨기는 효과적인 방법이다. 도토리 흉년이 들면 암컷 끼리의 경쟁이 치열하여 동족 파괴 행위를 저지른다. 다른 암놈이 파고 있는 도토리를 빼앗은 뒤 산란한 알을 제거하고 자신의 알을 깐다. 당한 암컷은 복수심에 불타 너 죽고 나 죽자는 식으로 나뭇가지를 끊어내어 버린다.

 

 

 

주둥이가 아닌 목이 길게 뻗어나온 왕거위벌레는 참나무와 오리나무류, 자작나무 잎을 먹고 산다. 몸 길이는 10mm 전후이며 다른 종과의 경쟁을 피해 도토리가 열리기 전 까지 활동한다. 열매가 아닌 나뭇잎을 김밥 처럼 말아서 아기 요람을 만들며 약 2시간에 걸쳐 산란을 하므로 느긋하게 지켜볼 수 있다.

신중하게 고른 잎의 중간을 반으로 자르고 주맥은 남겨둔다. 절반으로 나뉜 잎 끝을 두세 차례 말은 뒤 알을 낳고 다시 잎을 말아서 마무리한다. 남겨진 주맥 윗쪽의 잎은 지붕 역할을 하며 영어권에서는 잎을 마는 특성에 주목하여 잎말이바구미(leaf-rolling weevil)라고 부른다.

 

주삿바늘 주둥이로 도토리에 구멍을 낸다
일가친척으로 비슷한 생활사를 갖고 있는 도토리밤바구미는 황토색 몸매에 갈색 무늬가 있으며, 주삿바늘 처럼 생긴 주둥이가 도드라지는 녀석이다. 크기는 약 15mm 정도이며 참나무를 비롯하여 밤나무에도 꼬이는 놈으로서 삶은 밤을 먹다보면 가끔 나오는 통통한 애벌레의 정체다.

 

도토리밤바구미

▲ 도토리밤바구미. 삶은 밤에서 나오는 애벌레의 정체. ⓒ Daankal Eastolany
 

8월의 한 여름에 성충으로 대략 한 달간 활동하며 나뭇가지를 잘라내지는 않는 것이 도토리거위벌레와의 차이다. 산란 후 약 2주가 지나면 부화하며 애벌레 기간은 20일 정도 걸린다. 종령 유충은 9월 하순 이후에 밤에서 나와 땅 속으로 들어가 월동하며 이듬해 7월에 번데기가 된다.

가을이면 지자체에서 도토리는 다람쥐와 멧돼지 같은 동물의 식량이 되므로 채취를 하지 말라는 플랜카드를 매단다. 먹을 것이 부족하면 멧돼지가 인가로 내려와 농작물을 훼손하는 악순환이 벌어지므로 나 하나쯤 하는 생각은 금물이다. 더우기 다람쥐는 자신의 영역을 돌아다니며 땅 속에 도토리를 묻는다. 겨울을 대비하여 비상식량으로 삼기 위함이다.

다람쥐의 이기적인 활동은 생태계의 건전한 순환을 돕는다. 참나무 열매를 멀리 떨어진 장소로 퍼뜨려 숲이 울창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작 다람쥐는 도토리를 숨겨 놓은 장소를 항상 까먹는다. 결국 건망증이 참나무 숲을 키운다.

 

 

해당 기사는 초접사 사진집 [로봇 아닙니다. 곤충입니다]의 일부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오마이뉴스의 시민기자로서 여러 기사를 쓰고 있습니다. 원고료로 후원해 주시면 힘이 됩니다.
모든 기사를 보시려면 여기를 클릭하여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전 밤과 도토리, 상수리 파먹는 곤충 다음